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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으로 그렇게...

네델란드/덴하그(Den Haag),헤이그...열사분들을 뵙다.

by 라비린토스 스파이크 2009. 9. 10.

이글은 제 개인블러그에 포스팅했거나 동시에 포스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원문은
http://blog.daum.net/spikene/7292614 입니다.

네델란드/덴하그(헤이그)

덴하그는 우리에세 헤이그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그라펜하게(백작의 울타리)"라는 뜻을 가진 네델란드의 행정도시로 인구는 46만여로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도시입니다. 덴하그는 볼거리가 별루 없기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겐 특별한 곳이 있습니다. 이준열사 기념관이 바로 이곳에 있기때문에 네델란드를 방문한다면 꼭 가봐야 될 것 같고 그리고 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아침일찍 차를 가지고 길을 나섰지만 왠지 마음이 여느때와는 달리 즐겁지가 않고 묘하게 슬프고 묘하게 분노하게  된 하루였습니다.

썰렁하기가 일요일 같은 도시에 도착해서 기념관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찾기가 녹녹찮아 여기저기 물어도 알려 줄리 없고 주소하나 달랑들고 묻고 물어서 찾은 작은 호텔...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더 슬픈...길고 작게 "이준열사 기념관"이라고 쓰인 현판과 태극기...꾹꾹 눌렀던 슬픔과 분노가 밀려왔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시다 돌아가신 분의 기념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고 또 우리나라 정부의 무심함(이 건물은 한 교포분이 사제를 털어서 인수해 기념관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는 관장님의 말씀이 내내 맘에 걸리네요.)에 분노를 느끼는...아무튼 내평생의 최대의 경건함을 가지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좁은 내부로 들어서니 이준열사의 흉상과 기념관을 지키시는 관장님의 친절함에 감정이 조금은 추스려 진것 같습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사진찍기에도 민망하지만 양해를 구해 몇장 찍고 나니  채 30분도 안되어 방문이 끝나버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미안한 마음에 떠나기가 싫어서 다시 한바퀴...벽에 걸린 사진과 유품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으신 이상설,이위종열사의 히스토리를 꼼꼼히 읽으며 죄송함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기념관을 나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헤이그까지...지금도 먼거리를 그때는 더 멀고 험했겠지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각오로 오셨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지금 이분들의 1/100만이라도 간직하며 살아가야 우리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지 않을까 생각하며 헤이그를 떠났습니다.

 

 현관입구에 현판입니다.

 Wagenstraat 124번지가 기념관 주소입니다. 이주소로 현지인에게 물어보면 잘 알려 줍니다.

 이준열사 흉상

 

 

 

 확대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준열사 유품

 

 

 

 이준열사 약력

 방문객들이 남긴 글입니다.

 

 

 

 

 

 

 

 

 

 

이준,이상설,이위종 열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과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다음 백과사전에 나온 내용을 올립니다. 

 

개요

헤이그 /헤이그에 파견된 3명의 특사(왼쪽부터 ...이준,이위종,이상설 열사)
 
이 활동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국민의 반일감정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간의 이해관계를 상호 조정하는 국제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고종 폐위의 계기가 되어버렸다.

 

배경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또한 고종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은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라고 했다. 이에 고종은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육해전법규 등을 논의하지만 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파견과정

고종은 전(前) 의정부참판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을 평화회의에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주(駐)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과 이위종을 만났다. 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했다. 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곧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들은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하여 이같은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에게 널리 알려져 매일 각국 기자와 답지했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의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특히 7월 9일에는 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논해서 '억일부한'(抑日扶韓)의 여론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여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후 이들은 궐석재판에서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결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8일 일제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놓게 되었다.